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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타 팔로워 늘리기 GH, 연천BIX 지원시설용지 7필지 공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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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행복이
댓글 0건 조회 9회 작성일 24-02-27 0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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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타 팔로워 늘리기 경기주택도시공사(GH)는 경기 연천군과 공동으로 시행하고 있는 연천BIX 내 지원시설용지 7필지를 공급한다고 22일 밝혔다.
이번에 공급하는 지원시설용지의 공급예정가격은 2억9946만~3억3493만원이다. 필지별 상이한 금액으로 공급된다.
경기주택도시공사와 연천군이 조성하는 연천BIX는 연천군 연천읍 통현리 273-4 일원에 60만㎡ 규모로 조성되는 산업단지다. 전철 1호선, 국도 3호선 및 37호선 등 교통 인프라를 갖추고 있다.
또 경영 및 기술개발, 근로자 복지후생을 지원하는 기업지원센터와 행복주택 등이 예정돼 있다. 유네스코로부터 인증받은 생물권보전지역, 세계지질공원 등 수려한 청정 자연환경으로 친환경 식품클러스터로서 탁월한 입지를 갖추고 있다고 GH는 설명했다.
공급일정은 오는 3월4일이다. 경기주택도시공사 토지분양시스템(buy.gh.or.kr)을 통해 입찰을 실시한 후 3월 내 계약절차를 진행할 예정이다.
자세한 사항은 경기주택도시공사 홈페이지( 및 토지분양시스템을 활용하거나 경기주택도시공사 판매총괄처 산단판매부(031-220-3026)로 문의하면 된다.
등대가 있는 방파제에 걸린 깃발들에 ‘진상’만 남고, ‘규명’은 없다. ‘책임자’는 있는데, ‘처벌’은 없다. 거센 바람에 올이 풀려나가버린 깃발들은 지금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만 같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은 것은 거기 선 붉은 등대와 이제는 빛이 바랠 대로 바란 등대의 노란 리본이다.
10년 전 팽목항은 뉴스의 현장이었다. 이곳에서 배로 1시간 반을 달려가야 하는 바다에서 세월호가 침몰했다. 팽목항에는 중앙대책본부를 비롯해 수많은 몽골텐트가 가득 들어차 있었고, 혼란스러웠다. 시신이 이곳에 들어오면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하염없이 기다리던 유가족들이 하나둘 떠나고, 마지막까지 시신을 찾지 못한 실종자 가족들이 지키던 곳에는 컨테이너 박스 4동이 낡은 모습으로 서 있다. 거기에 304명의 사진을 걸어놓고, 그들을 기억하자는 ‘4·16기억관’도 있다. 방파제를 들렀던 사람들이 이곳을 지금도 찾는다. 거기에는 너무 늦게 찾아와서 미안합니다 그날을 잊지 못합니다와 같은 말이 적힌 방명록이 놓여 있다.
주변이 개발되고 제주까지 오가는 페리호가 드나드는 항구가 되었지만, 이곳은 늘 쓸쓸하다. 간간이 찾아주는 방문객들이 반가울 정도다. 그런 곳에 2월26일에 많은 사람들이 방문했다. ‘세월호참사 10주기 전국시민행진’ 이틀째의 행진 시작을 위해서다. 전날 제주도에서 넘어온 사람들과 서울과 안산에서 온 유가족, 시민들이 함께 방파제부터 행진을 시작했다. 진도 행진의 마지막은 진도군청이다. 2년여 전 이곳에 작은 기억 공간을 마련해주기로 약속했던 진도군수를 만나서 약속 이행을 촉구하기 위해서다.
죽음으로 죽음을 덮는 일의 반복
이번의 전국시민행진의 제목은 ‘안녕하십니까?’이다. 절망과 분노의 나날을 살아가는 고통 속의 사람들을 만나서 안녕을 물으려고 한다. 세월호참사에서 사라진 국가는 이태원참사에서도, 오송지하차도참사에서도 역시 부재했다. 진실은 왜곡되거나 덮였고, 책임자들은 누구도 제대로 처벌되지 않았다. 그리고 강요된 망각의 시간이 지나고 있다. 여전히 진실을 알고자 하고, 책임자들을 처벌하자고 목소리 내는 피해자와 시민들에게는 어김없이 혐오와 증오의 말이 퍼부어진다. 소 잃고도 외양간 고칠 생각을 하지 못한 이 나라에서는 참사가 나면 ‘인재’와 ‘재발방지 대책’을 요란스럽게 떠들다가 곧 다른 사건으로 관심이 옮아가고는 했다. 대형 재난참사를 겪고도 그걸 기억하지 못한 그 자리에 다른 대형 참사가 일어나서 앞의 참사를 가리고는 해왔다. 죽음으로 죽음을 덮어온 역사를 세월호참사에서도, 이태원참사에서도 반복할 것인가? 이번 행진은 그런 물음을 던지는 것이다.
행진 출발은 제주도였다. 10년 전 안개 속의 인천항을 출발한 세월호 승객들의 최종 목적지는 제주도였다. 배에는 생애 처음 수학여행을 떠나는 단원고 학생 325명이 탑승했고, 자전거동우회 회원들, 환갑기념 여행을 가던 용유초등학교 동창생들, 제주도로 이사를 가던 가족, 그리고 육지를 오가며 물류를 나르던 화물기사 등이 탑승해 있었다. 여행을 가던 그들이 참사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공통적으로 갔을 장소가 성산일출봉이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행진 출발 기자회견을 열었다. 기자회견에서 ‘세월호를 기억하는 제주 청소년 모임’을 대표하여 김원 학생은 말했다.
청소년들은 자라오면서 ‘가만히 있으라’는 말을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안전한 사회를 위해 함께할 것입니다.
그날의 공감을 다시 보고 싶다
이태원특별법 거부권 행사는 폭력이다
2024년에는 ‘해방’의 단초를 만들 수 있을까
이충상·김용원, 두 인권위 상임위원은 사퇴하라
10년 전,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말은 삶을 의미했다. 죽음을 거부하고, 함께 살아가기 위해 행동하겠다고 다짐하던 청소년들의 모습이 겹쳐졌다. 아직 청소년들이 스스로 행동하겠다고 해야 하는 세상에 살고 있음에 나는 한없이 미안했다. 세월호참사 10년, 진실은 온전히 밝혀지지 않았고, 책임자들은 그물을 빠져나가는 물처럼 달아났지만, 시민들은 달라졌다. 생명존중과 안전사회라는 공통의 목표가 생겨났고, 그런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이제 세월호참사 10주기가 채 50일도 남지 않았다. 21일간 전국의 주요 도시들을 거치는 행진 마지막 이틀(3월15일, 16일)은 안산에서 서울로 행진한다. 그 행진에 참여한 사람들과 안녕하십니까? 반갑게 인사하고, 세월호참사를 잊지 않는 우리를 다시 보고 싶다. 10년 전 그날처럼 공감할 줄 아는 사람으로 만나고 싶다.
경기 광명시 광명역 옆 소하동에 오리 이원익 기념관이 있다. 이원익(1547~1634)의 집이었고, 그가 생을 마감한 곳이다. 오리(梧里)는 이원익의 호인데, 마을 이름이다. 오동나무가 많은 마을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조선시대 선조, 광해군, 인조 대에 정승을 지낸 인물이다.
이원익은 선조 2년(1569) 문과 합격 후 관직 생활을 시작해서 재상급에 있었던 기간만 40년에 가까웠다. 이원익이 재상이 된 선조 중반 무렵은 우리가 이름을 아는 천재급 인물들이 군집해 있던 시기이다. 이이, 류성룡, 정철, 이산해, 이항복, 이순신 같은 사람들이다. 이 시기에 탁월한 인물들이 많아서 이미 조선시대에 ‘목릉성세’라는 말이 있었다.
이원익은 영의정을 세 번이나 역임했다. 선조 때인 임진왜란 중에 처음 영의정이 되었고, 광해군의 첫 번째 영의정이었고, 인조의 첫 번째 영의정이었다. 광해군의 첫 번째 영의정이었는데, 광해군을 축출하고 집권한 인조의 첫 번째 영의정이 되었다는 것은 흥미롭다. 그가 처세에 유달리 뛰어났기 때문은 아니다. 그는 당대의 탁월한 인물들에게 널리 인정받았다. 이원익의 무엇이 그런 평가를 가능하게 했을까?
인조반정이 성공하자 광해군 대의 정치적 파행에 책임을 물어 정인홍이 처형되었다. 반정 다음달인 4월 초에 89세 나이로 참형(斬刑)에 처해졌다. 정인홍은 광해군 대에 있었던 임해군과 영창대군의 죽음, 그리고 인목대비의 경운궁 유폐에 모두 관련되었다. 인스타 팔로워 늘리기 광해군 재위 기간에 그와 이원익의 관계도 좋지 않았다. 위 세 사람의 처벌 문제를 두고, 두 사람은 대립했다. 이원익은 너그럽게 처리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정인홍은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인목대비 문제로 이원익이 강원도 홍천에 귀양 가 있을 때, 정인홍은 그 처벌이 너무 가벼우니 벌을 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라는 책에 나오는 이원익의 정인홍에 대한 언급은 이원익이 가졌던 인간 이해의 한 자락을 보여준다. 정인홍이 죽은 후 이원익은 가까운 후배 재상에게 이렇게 물었다. 당신도 나중에 마음이 바뀌어서 소인(小人)으로 변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소인’이란 말은 세상 물정에 대한 이해력이 떨어지고 바른 도리를 지키지 못하는 사람을 뜻했다. 그러자 그 재상은 제가 비록 옛 성현들만은 못해도 어찌 소인까지야 되겠습니까?라고 말했다. 그러자 이원익은 정인홍은 젊어서부터 원칙을 지키는 사람으로 유명했소. 그 사람이 폐모론에 관여하리라 누가 예상했겠소?라고 반문했다. ‘폐모론’은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조선시대에 어떤 이유로도 허용될 수 없는 주장이었다. 이원익이 이어서 말했다. 나이 늙고 뜻이 쇠해지고 친구들이 밖에서 권하고 자손이 안에서 충동질하여, 마침내 폐모를 청하는 상소를 올려서 90세 나이에 처형되었소. 나는 그 일 이후 나 자신을 더욱 조심하고 두려워하며 지냅니다.
조선시대의 묘지 싸움, 산송
매화 피는 철이면
병곡역 난투 사건
역사의 시공간에서 주어는 자주 바뀌어도 술어는 별로 바뀌지 않는다. ‘폐모론’이 역사의 시공간에서 주어라면, 나이 늙고 뜻이 쇠해지고 친구들이 밖에서 권하고 자손이 안에서 충동질하는 것은 술어에 해당한다. 주어는 그때그때 바뀌는 문제와 쟁점이고, 술어는 그것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와 처리 방식이다. 지금은 왕조시대가 아니니 ‘폐모론’ 같은 것이 문제 될 수 없다. 하지만 지금도 나이 늙고 뜻이 쇠해지고 친구들이 밖에서 권하고 자손이 안에서 충동질하는 상황은 나타날 수 있다.
이원익은 사람은 누구나 잘못된 방향으로 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이 그가 남에게 너그러우면서도 스스로에 대해서는 엄격히 절제할 수 있게 해주었을 것이다. 요즘 말로 하면 그는 인간에 대한 메타인지가 뛰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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